중국역사상 유일의 여황제 - 측천무후!

    반응형

    중국역사상 유일의 여황제 - 측천무후!

     


    중국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로 등극한 측천무후는 어떻게
    여자로써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것인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624년 당나라는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중원의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던 그때
    개국공신인 무사확의 둘째 딸인 무조가 태어납니다.
    무조는 14의 나이에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고 그때가 637년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무조는 당시 미인의 기준이였던 넓은 이마와 턱을 가지고 있어
    당태종의 귀여움을 받아 관심을 받았지만 생김새와다른 담대한 성격에 흥미를 잃습니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고 황제의 9남인 이치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당시 정신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태종의 적장자를 제치고
    이치가 황태자의 자리를 찾이하게 됩니다.
    무조는 이치와 자주 마주치며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이세민이 사망하자 649년 이치가 당의 3대 황제 고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황제가 사망하면 자식을 갖지 못한 후궁들은 황실의 관습에 따라서 출가를
    하여 감업사로 무조도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때 고종과 무조는 감업사에서 종종만나며 그 정을 더욱 쌓게 됩니다
    그렇게 무조는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게 되며 당시는 황후와
    숙비 소씨가 궁중에서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고 있던중이였습니다.
    무조는 황후편에 서게 되었으며 궁궐내에서 인지도를 높여 나가게 됩니다.
    그러던중 무조는 아들 이홍까자 낳게되자 오히려 황후와 소숙비가 무조를 견재하게되고
    마침 황후가 무조의 아들을 보고가게 되는데 황후가 돌아간후 무조는
    자신의 아들을 가기손으로 죽인후 왕후의 짓이라고 모함을 하는 파렴치한짓을 벌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왕후는 신임을 잃고 결국 이일로 인해 페황후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무조가 바로 측천무후 새로운 당 고종의 황후로 책봉이 이뤄집니다.


    하지만 고종이 다시 폐왕후를 측은하게 여기자 측천무후는 폐왕후와 소숙비를 팔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독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이때 죽으면서 소숙비가 무조에게 했던 저주가 바로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나는 고양이가 되고 너는 쥐가 될것이고 결국 내가 널 죽일것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죽은 사람의 얘기가 후세에 퍼졌을리 만무하지만 그만큼 억울한 죽음이였던것이겟죠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롤 책봉하게 되고 자신을 반대하는 저수량같은
    반대세력까지 숙청함으로써 이제는 더이상 측천무후를 막을 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로인해서 선비족 출신의 '관롱집단'은 측천무후의 손에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고종의 신임속에 당나라는 측천무후를 중심으로 재편되며 더욱더 공고한 권력을 잡아나갑니다.
    660년 고종이 중풍으로 정상적인 정무를 못보게 되자 측천무후가 나라를 통치하게 되며
    고종과 갈등은 겪지만 결국 수렴청정을 시작하여 그시기 고구려정벌과 나당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와도 결코 땔 수 없는 중국이지만 측천무후의 시기의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굉장히 큰 이슈들이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측천무후는 뛰어난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민심까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675년 무조의 아들인 태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갑자기 떠난 태자에 대한 측천무후의 독살설이 있다 보니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첫째가 죽자 둘째인 이현이 태자로 책봉되고 이현은 나름 유능한 모습을 보이자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도 경계하여 결국 모반혐의로 태자를 폐하고 다시 셋째를 태자로 세웁니다
    아무리 권력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들 마저도 정적으로 생각하고 쳐내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결국 683년 고종이 사망하자 태자는 4대 황제 당나라 중종으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이미 측천무후의 세력으로 채워진 조정에 중종의 자리는 없었고
    결국 말실수가 근초가 되어 고작 2개월만에 폐위를 당하게 됩니다.
    측천무후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 반란은 빠르게 진압화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90년 드디어 측천무후는 67살에 나이로 당나라의 여 황제로 즉위를 하게 되며
    그녀가 중원의 황제로 등륵하게 되었습니다.
    즉위후 국호를 주로 바꾸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며 과거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신분에 상관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관료를 채용하여 빠르게 안정적으로 통치를 이어갑니다.
    노년에 이른 측천무후는 역시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 문제가 커지게 되는데요
    이씨 황제를 원하는 세력과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세력간의 다툼은
    결국 정변을 불러오게 되고 81살의 측천무후는 결국 태자에게 황위를 넘기 면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보통 우리는 측천무후라고 하면 상반댄 평가가 팽팽한 편인데요
    당나라초기에 정세를 안정적으로 평정하면서 전성기로 들어서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는것에 비해서 역시나 악녀로써도 상반된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어쨌떤 중국역사상 유일의 여황제로써 그의미는 크다보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 여황제가 없었던것도 의아하긴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황제까지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그 인물이 대단하기도 하며
    오히려 통치시대에 정치나 경제나 외교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또한 그 인물의 위대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